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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지기위해모이는교회

24A 4rd, 야고보서 2:1-13, 다르게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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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차별’과 관련된 내용이다. 당시 야고보의 시대에서도 차별은 문제로 대두됐다. 교회에 오는 사람의 형편, 명성에 따라 차별적으로 대우했다. 손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의 부류와 가난하여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의 부류가 있었다. 아룸다운 옷을 입은 사람은 당시에 재정적으로 부자이며, 지위와 신분이 높아 힘이 있는 자들이었다. 반대로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은 교회공동체에 딱히 도움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실례이자 상대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교회는 두 부류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차별이 공동체의 하나됨을 망가뜨리거나 방해하는 윤리와 도덕적 차원을 훨씬 넘어서서, 하나님이 교회에 부여하신 권한과 힘을 인정하지 않는 비신앙적인 모습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 문제에 대해 말했다.

4절을 통해 차별하는 행동을 통해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리의 앞길과 옳고 그름, 온전한 통치를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고유권한을 이용하신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이다. 하지만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나의 기준으로 결정권을 가졌다. 결정권을 가져왔다는 것은 우리의 주권자인 하나님을 삶 밖으로 밀어낸 것을 의미한다. 더이상 하나님을 내 인생에 주권자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적극적인 행위로 볼 수 있다.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분명한 결정이 있다. 교회를 세우시고, 이 땅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온전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지혜대로 교회를 운영해 가신다. 그래서 성장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주실 때도 있고, 속도를 내지 않고 연약함이 성숙되도록 은혜를 부어주실 때도 있다. 도움이 되는 지체를 교회공동체에 불러주시기도 하지만, 인격적인 성숙을 위해 결이 맞지 않는 사람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통치를 더욱 깨닫게 하실 때도 있다.

그럴 때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 오늘 야고보의 편지를 받는 공동체를 보면, 사람을 가리는 기준을 자신으로 세웠다. 괜찮은 사람이 오면 도움이 되기 때문에 환영하고, 괜찮지 않은 사람이 오면 명성과 이미지에 방해가 될 것 같아 하대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건강하고 아름답게 이끌어가시는 통치와 결정권을 망가뜨리고 우리의 기호로 채우는 행위다.

이것은 교회공동체뿐만이 아니다. 각 개인의 삶에 비춰봤을 때도 마찬가지다. 물론 성장할 수 있도록 그 힘을 부어주실 때도 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을 함께 이기도록 공급하시며 성공만이 아니라 더욱 깊게 묵상하도록 하기도 하신다. 선하고 좋은 일을 통해서, 또 눈물과 고통과 인내를 통해 시기 적절하게 구성하시고 여러 비율로 배합해 우리에게 제공하신다. 하지만 형편없고 경박한 상태가 아니라 성숙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보이시며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슬픔, 고난, 고통을 다른 편법으로 바꾼다면 우리의 삶이 망가짐과 동시에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배제한다. 즉,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가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인간의 시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 권한을 침범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보다는 우리 눈에 흡족한 공동체, 개인의 삶을 만들어간다. 그러함에 있어서 야고보는 차벌에 대한 심각정을 제기한다.

차별은 좋다, 나쁘다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어학사전을 찾아보면,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에 차별을 두어 나누는 것으로 설명한다. A와 B를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 자체를 좋다, 나쁘다로 판단하기 보다 좋은 의도로 사용하면 좋은 것이고, 나쁜 의도로 사용하면 나쁜 것이다. 일상에서도 차벌을 통해 관계를 깊이 만들어가는 것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발렌타인데이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초콜릿을 준다. 차별은 우리의 마음을 전달하는 데 유용한 도구다. 성경은 그래서 차별을 터부시하지 않는다.

차별을 통해 하나님께 향한 믿음을 증명하기도 한다. 십계명을 볼 때에도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이것 역시 차별이다. 하나님이 가장 여기시는 십계명의 첫 번째는 다른 신보다 더욱 차별하여 온전하고 유일하게 섬기라고 차별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 역시도 차별적이었다. 당시 이집트, 모압, 암몬 등 많은 민족들 중 하나님이 특별히 이스라엘 사람들을 선택해 차별적 사랑을 베푸셨다. 인종이나 특별한 단체를 드러내려기 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차별‘을 이용하셨다. 이것을 통해 공평한 것은 사랑이 아닐 수 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관계를 더욱 깊이 만들어가는 데 특별함을 전제로 한다면 차별은 우리 삶 속에 유의미하게 드러난다. 병원에서도 그 사람의 상태에 따라 차별적으로 진료한다. ’차별이 나쁘다‘가 중요한 게 아니라, ’차별을 왜 행하느냐‘가 이 본문의 핵심이다. 내 유익을 위해 차별한다면 영적 범죄, 사회적 범죄가 될 수도 있지만 이웃을 위해 차별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 즉, 야고보는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라는 메시지를 비롯해 7-8절에 나오는 내용으로 종결한다. 내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라는 메시지다. 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차별이 필요하다고, 이옷의 형편과 상태에 따라 맞춤식으로 사랑을 공급하는 것이 중유하다고 야고보는 말한다.

차별은 사랑을 표현하는 좋은 도구다. 사람마다 성향이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는 선물이, 어떤 사람에게는 대화가 필요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전달하는 사랑의 내용은 달라진다. 슬플 때에는 같이 울어줄 수도 있고, 고독 속에 있다면 함께 있어줄 수도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차별적 사랑이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차별적 사랑이다.

우리는 동등함과 다름을 갖고 있다. 교회공동체에는 각기 다른 형편에 다른 사람들이 모였다. 꿈과 비전이 있어 앞으로 전진하는 사람도 있지만, 미래를 고민하고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다. 다른 형편에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동등한 존재다. 이 존재의 무게는 얼마나 많은 능력을 갖고 있는지, 높은 스펙을 갖고 있는지와 동등하지 않는다. 하나님 안에서 존재 무게는 동등하다. 하지만 다양한 감정, 색깔, 욕구, 기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동일한 존재지만 다른 필요를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공동체와 함께하려면 ’차별‘이 필요하다. 누군가에게는 조언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침묵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웃을 더욱 깊이 연구하자. 상대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불편해하는 게 무엇인지, 비전은 무엇인지, 상처는 무엇인지 등등. 시간을 내어 애써 연구하자. 왜 믿음 안에서 성장해야 하는지 차별적 사랑 안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내가 가진 장점이 상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내게 없는 것을 상대가 필요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공급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 그래서 상대가 필요한 게 무엇인지, 어떤 방법으로 전달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궁금해야 한다. 함께하는 사람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 그로 인해 사랑을 공급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축원한다.

두 가지를 위해 묵상하고 기도하자. 섬겨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내가 사랑이라고 생각한 일방적인 생각으로 상대에게 다가간다면 관계는 어려워질 수 있다. 상대의 필요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주님의 사랑을 흉내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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