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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지기위해모이는교회

240331 요한복음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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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부활주일이다. 고난주간을 어떻게 살았는지 되짚어보며 매년마다 오는 부활주일이 형식적이기 보다 의미 있는 날이 되길 바란다.

알고리즘을 타고 ‘피해야 할 사람’, ‘반드시 걸러내야 할 사람’의 글들이 뜬다. 그 글들의 공통점을 추려보니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 ▲약속을 쉽게 어기는 사람 ▲남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 ▲피해의식에 빠져있는 사람 ▲뒷담화를 즐겨하는 사람 ▲은근히 나를 무시하는 사람 ▲금전관계가 깔끔하지 못한 사람 ▲자신의 생각과 기준을 강요하는 사람 ▲평소에는 잘 안하다가 아쉬울 때 연락하는 사람 ▲호기심이 많아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 ▲자신을 과도하게 드러내는 사람 등.

안 좋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정중하게 거리를 두는 것을 지혜로 꼽는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나에게도 그 성향이 전달되기도 한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물리적으로 피해를 받기도 하고 동화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에 대한 정의는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의 성향과 특색이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다양한 곳에서 예수님을 정의한다. 예수님께 공생애 기간 동안 본인에 대해 스스로 솔직하고 분명하게 드러내셨고, 성경 곳곳에는 그러한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다. 오늘 본문도 그 부분 중 하나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짧고 명확하게 스스로를 정의하셨다.

부활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짧게 설명해보자면, 부활은 살아나는 것이고 생명은 살아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특징은 부활과 생명이니, 영원한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생명이시니 그 족적마다 살아있는 것이 계속 나타난다. 생명이 관계를 맺고 연결되는 일마다 살아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삶의 모습을 보면, ‘생명’과 얼마나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사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행적을 보면,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일들을 하셨지만 일련의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의 첫 번째는 주변 사람들을 많이 먹이셨다. 심지어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고 첫 번째로 행하셨던 기적은 잔칫집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것이었다. 그리고 오병이어 기적을 보이셨으며,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조차 금지된 유대인의 안식일 조차 제자들이 밀 이삭을 먹는 것을 지지하셨다. 그리고 주변의 죄인, 새리들과 어울리며 식사하셨다. 당시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보며 ‘예수는 선지자와 같은 교훈을 남기기는 하지만 먹을 것을 탐하는 사람이다’라고 오해할 정도로 주변 사람들을 먹이시고 마시게 하셨다.

그 공통점의 두 번째는 치유하시고 고치셨다. 귀신들린 자, 앞을 못 보는 자, 걷지 못하는 자 등 이 땅에서 건강하지 못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고치셨다.

세 번째로는 가르치셨다. 우리의 삶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진리를 가르쳐주셨다.

예수님은 육체가 살아갈 수 있는 음식을 공급하셨다. 인생을 살아가는 생존에 멈추지 않으셨다. 앞을 못 봐도, 걷지 못해도 생존은 가능하다. 하지만 성경은 ‘살아있다’를 모든 육체가 건강해서 편안하게 일상을 수행한다는 것을 뛰어넘어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와 소통을 맺는 상태라고 말한다. 당시 앞을 보지 못하고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을까. 당시 율법 상 하나님께 제사는 예배를 온전히 드릴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께서 단순히 그들의 신체적 불편을 고치신 것을 넘어 하나님과의 깊이 있는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모든 일들을 보면 ‘생명’과 관련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고, 심지어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까지 살리셔서 하나님과 관계를 다시금 연결시키셨다.

그리고 예수님 삶의 마지막을 보면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통해, 그가 공생애 기간 동안 보여주셨던 부활의 의미를 직접 증명해내시고 마침표를 찍으셨다. 자신이 부활과 생명이라는 명확한 진리를 우리에게 직접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살아서 하셨던 모든 말씀, 사건, 기적, 행보는 ‘부활과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부활과 생명의 영향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굳이 다시 회복되고 싶지 않아도 예수님과 깊이 연결된 상태 하나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연결된 모든 이들에게 흘러간다.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정체성을 정의하신 이후,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하는지 설명한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누리는 가장 큰 유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유의 특색을 우리의 삶에 담아내는 것, 부활과 생명의 삶을 사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생명을 깊이 품어 살아내는, 우리 삶 속에 무엇인가가 살아나는, 그리고 이것을 통해 나와 관계 맺는 누군가들이 살아나는 것이다.

예수님을 온전히 믿었을 때 죽었던 무언가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죽어 있던 정의와 공의, 양심이 살아나는 것. 예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청결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만드셨다. 그래서 누군가가 힘들고 아파할 때 함께 슬퍼하고, 누군가가 불의를 겪을 때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게 하셨다. 우리는 살아있는 양심으로 예수님과 같은 삶을 구현해 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어른이 될수록 훼손되어 있고, 마비되어 있다. 사회적 관행에 어느정도 타협해가며 살아간다. 예수님과 깊이 교제하면 할수록 무뎌졌던 양심이 하나씩 생명력을 얻기 시작한다. 바른 것들을 따르고, 옳은 것들을 추구하고, 거짓된 것들과 선을 긋기 시작하고. 예수님이 가신 길들을 따라가기 시작한다.

죽은 비전도 다시 살아난다. 우리는 생존과 안정을 위해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실재적인 것에 치우쳐져 있다. 하지만 예수님과 깊이 있는 관계를 맺는다면 생존과 안정의 가치를 훨씬 넘어서서 숭고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삶의 목표와 방향으로 정한다. 이전에는 안정된 것에 만족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할수록 그가 갖고 있는 생명력이 스며들기 때문에 안정감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결핍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본성이 공격적이냐, 얼마나 많은 것을 갖고 있느냐와는 상관 없이 예수님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비전은 구체적으로 된다.

더 나아가 죽은 관계도 다시 살아난다.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하지 않고, 질투를 하지 않는다. 친밀감이 더욱 끈끈해져 간다.

부활과 생명이란 이런 것. 개인적인 욕심으로 틀어지고 망가진 양심, 삶의 가치, 방향, 관계 등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반응함으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창조하신 대로 다시 살아난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한편으로 부활과 생명의 삶을 온전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동시에,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 반대편에서 계속해서 죽어가는 죽음의 삶을 사는 것이다. 양심, 비전, 관계가 살아난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힘들기 때문이다. 즉, 살아난다는 것은 동시에 죽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안에 무뎌졌던 양심이 섬세하게 살아난다고 생각해보자. 일상을 살아가기 어렵다. 불의를 타협하기 곤란해진다. 지나가는 곳곳마다 양심 때문에 잘못된 부분이 눈에 계속 띄기 때문이다. 비전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비전이 살아나는 것은 안정된 삶과 계획을 내려놓고 불확실한 미래에 끊임없이 직면해야 한다. 동시에 현실적으로 맞닥뜨리는 실패를 전제하고 감수해야 한다. 관계가 살아나는 것도 자기 욕심과 기준을 부인하고, 애써 사랑을 선택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관계의 회복이 진행된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자 영생의 삶이다. 욕심에서 죽고 말씀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며, 부활의 영광을 죽어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 끊임없이 누리며 유지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묻는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헬라적 사고 안에서 ‘이것을 이해하고 납득하냐’의 개념이 아닌, 히브리적 사고로 ‘이것을 할 수 있냐’의 개념으로 물어보셨다. 더 나아가 우리의 의중을 묻기 보다 “했으면 좋겠다”라는 청유형 명령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성도의 삶 속에 부활이 나타나고 있는가. 부활주일은 고난이라는 죽음을 이겨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기쁜 날이다. 다른 종교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이한 부분이기도 하고, 그래서 진리적인 사건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설렘과 기쁨으로 다가오는지 스스로 점검해보자.

삶 속에 부활과 생명의 삶이 시작하길 바란다. 우리 안에 새로운 부활과 생명을 경험하고 갱신하길, 예수 그리스도만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우리 역시 부활을 경험하여 갖고 있는 욕심을 버리기를 바란다. 영원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고작 100년도 살기 어려운 나의 교훈과 고집, 기준, 욕심을 주님과 이웃에게 들이대는 것은 모순적인 일이다. 부활의 삶은 내가 그동안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종지부 찍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 종지부 이후 삶이, 양심과 가치, 비전, 관계가 새롭게 살아난다. 그러한 생명의 삶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주일이 되길 바란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욕심을 하나씩 죽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여 그분의 성품과 말씀대로 살아가자.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뜻이 하나씩 살아나길 바란다. 영광스러운 주님이 우리 안에 살아나길 바라며, 이를 통해 나와 관계 맺는 주변의 사람들이 살아나는 삶이 풍성하게 나타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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