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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지기위해모이는교회

24A 10nd, 야고보서 4:13-17,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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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02 / 야고보서 4:13-17 / <과연 그럴까> / 흩모교 지성해p

본문은 본인의 계획을 자랑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야고보는 그들을 향해 경고한다. 어떤 계획을 자랑하고 있는지 따져보면, 오늘날과 비교했을 때 자랑할만한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당시 배경으로 보면, 거주 지역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을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치안이 보장되지 않았으며, 어느정도 인맥도 기반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위험요소를 발견할지 모른다. 또 모르는 사람이 지나가면 적개심을 표시했던 시대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사를 하기 위해 먼 곳으로 이동해 이윤을 남기는것은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한 용기와 배포가 있던 태도다. 또한 추진력, 결단력, 비전, 포부 등을 엿볼 수 있다.

본문은 이에 대해 ‘허탄한 생각이다’라고 표현한다. 의미없고 허황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 계획에 변수가 포함돼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4절에서도 ‘안개’라고 표현한다. 계획을 이끌어가는 인간은 안개처럼 한없이 연약한 존재라 그 계획을 끝까지 이끌수 없다는 것도 강조한다.

모든 상황에는 변수가 존재한다. 이러한 변수로 인해 우리가 세운 계획들이 초라하게 결론맺어질 때에도 있다. 예상하지 못한 특별한 상황을 변수라고 한다. 그 반대말로 상수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계산하고 변하지 않는, 상수라고 생각한 계획에서 예측불허한 이슈가 하나씩 발생하며 우리의 계획을 망가뜨린다. 그래서 ‘변수’하면 우리 머릿속에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불안요소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우리와 관계맺는 사람과 예측이 불허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경계한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예측가능한 사람을 선호한다. 단순히 좋은 스펙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스펙을 토대로 예측가능한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측이 불가능한 사람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예측을 지양한다. 예를 들어, 학교 이름과 생각없이 선호하는 학과를 보자. 이것은 변수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선호하는 학과에 입학한다면 이후 삶에 대한 변수가 사라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와 반대되는 다른 계열의 경우에는 졸업 이후 어떠한 삶의 변수가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기피한다.

우리가 열심을 다하는 수고도 미래의 변수를 조금이나마 없애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다. 많은 재산을 모으고,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나중에 발생할 변수에 대처할 수 있다고 여긴다. 우리의 기도 내용 역시 나중에 있을 예상치 못할 상황을 대비하는 내용이다. 평탄하고 안정된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주님께 그러한 내용을 기도를 통해 고한다.

모순적이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혜는 변수 그 자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개입하시는 다양한 인도하심은 우리에게 있어서 항상 변수로 나타난다. 아무리 우리가 갖고 있는 상상력을 발휘해도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실지 예측할 수 없다. 사회적으로 마련된 통계나 성경적 논리를 짜집기 해서 하나님의 행동을 예측하려고 해도 우리의 논리를 벗어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국면으로 인도해가신다.

이사야55장에 이러한 내용이 언급된다. 8-9절을 보면, 우리가 아무리 상상력을 다 해도 하나님의 생각을 읽어낼 수 없음은 우리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훨씬 크고 다채롭다고 한다. 하나님의 계획에 맞닥뜨릴 때 언제나 당황스럽고 놀라운 변수다. 그리고 이러한 변수는 얘기치 못한 깊은 슬픔으로 인해 절망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절망 속에서도 얘기치 못한 참된 기쁨, 새로운 소망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우리를 일어나게 하신다. 그 방법은 아무리 상상해도 예측하거나 대비할 수 없다.

변수로 인해 새로운 일상에서 새로운 것들을 보게 한다. 우리를 당황스럽게도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일상을 살아가며 반드시 적용해야 할 변수가 있다. 첫 번째로, 무지요, 두 번째는 약함이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 수 없다. 그래서 당황할 수밖에 없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안개와 같이 약해서 금새 사라질 존재이며, 그것을 대응할 능력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무지와 약함을 적용해야 한다. 이것을 반영하기 시작할 때 허망한 자랑들에서 벗어날 수 있다. 허망한 자랑이 우리 안에서 사라질 때 진짜 믿음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능력에 모든 것을 내어맡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 삶속에 초대하기 시작한다.

하나님을 우리 인생에 적극적으로 초대하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약함을 보충해 가시도록 모든 주도권을 주님께 맡겨드릴 때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 삶속에 또다른 긍정적 의미의 변수를 만들어주신다. 예상하지 못한 기회와 사람, 도움과 방법을 우리에게 적용하시며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안내하신다.

복음서의 예수님 제자들은 하나같이 위대한 사람들이 아니다. 세상적으로 지탄받는 직업도 가진 제자도 있었다. 그들은 사람의 비난도 하나의 상수값이려니 여기고 그냥 살아갔다. 예수님을 만난 후 사도로써의 변수가 나타난다.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예수님이라는 구원자를 만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상상해보지 못한 새로운 삶을 맞이하게 됐다. 어부로 태어났지만 사도로 죽고, 새리로 태어났지만 복음을 전파하기도 했다.

하나님이라는 변수는 우리에게 상상하지 못한 기회를 제공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이라는 변수를 우리 삶속에 반영할 때, 우리의 능력으로 도달하지 못한 단계까지 도달하게 된다.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한계선은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것을 뚫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이라는 변수다. 인간 본능의 상수값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변수를 적용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고정관념, 편견이 있다. 우리가 좋은 조건들을 갖고 있다면 내일도 탄탄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예상한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말한다. “과연 그럴까?” 반대 사람도 있다. 지금 갖고 있는 훌륭하지 않은 조건들로 인해 이번 생은 이정도로 그치며 체념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 나름대로 한계선을 그어놓은 사람에게도 야고보는 “과연 그럴까?“라고 질문한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어떠한 기회가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내일은 우리에게 변수다. 어떠한 일이 벌어날지 알 수 없고, 오늘의 성취가 내일의 성공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오늘의 실패가 내일의 절망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감사한 것은, 주님은 우리에게 상수값이다. 주님은 변하지 않는다. 내일은 변하지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한 주를 마치고 또 다른 한 주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지를 살아가는 두려움, 떨림에 멈추지 않고 새로운 소망과 설렘으로 채울 수 있다. 내일은 변수지만 우리를 향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일을 인도해가신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의미하고 지루한 삶이 아니길 바란다. 갖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아등바등 사는 삶이 아니길 바란다. 다이내믹한 하나님이라는 변수를 맞이하며 매일 다양한 변화를 겪어나가길 바란다. 이를 통해 우리 능력치로 그어진 경계선을 넘고, 넘어간 그 곳에서 주님께서 허락하신 진정한 자유를 누리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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