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A 12nd, 야고보서 5:7-20, 인내의 의미
오늘 본문은 주의 강림이 곧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라고 말한다. ‘강림’은 하나님이 다시 오실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땅을 살아가는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말한다. 마음을 굳건하게 하여 길이 참으로 한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이 시기에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을 훼손하는 요소에 현혹되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정결하게 기다리라는 바람이 담겨 있다. 즉,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삶의 태도를 농부로 비유했다. 열매를 기다리면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농부의 비유를 통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태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지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에 대해 말해보자. 이른 비는 가을비를, 늦은 비는 봄비를 말한다. 가을비는 10-11월에 내리는 비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동풍에 땅이 마르기 때문에 이른 비에는 농사짓기 어렵다. 반면 늦은 비는 3-4월에 내리는 비다. 곡식이 충분하게 수분을 먹고 영근다. 귀한 열매를 바라면서 비를 바라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 땅이 완성될 것을 기다리는 성도의 온전한 태도는 믿음의 고난을 감내하라는 교훈이다.
오늘날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상이 있기 때문에, 일상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 사이에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물음표가 뜬다. 그렇다면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그 사이에 과연 농부는 무엇을 하며 기다릴까. 비를 만들어내는 건 농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비가 오게끔 농부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럼 농부는 나태하게 누워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가. 마냥 비가 오길 기다린다면 우리가 이 때를 살아가는 데 잘못된 태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일상을 내버려두고 나태한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부들이 농사를 어떻게 짓는지 살펴보자. 햇빛이 얼마나 강렬한가, 곡식이 갈증을 느끼지 않을만큼 비가 충분히 내리는가가 그 해 농사의 핵심이다. 안타깝게도 농부는 이 두가지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 철저하게 농부의 권한에서 벗어난다. 그럼 그 사이에 농부는 무얼 하는가. 볍씨를 준비해두고, 밭을 갈아엎어 아래에 있는 땅을 위로 오게 한다. 그런 다음 돌이나 자갈을 걸러내 고르게 한 다음, 땅을 촉촉하게 만든다. 진흙처럼 질퍽이는 땅에 씨를 뿌린다. 그 이후 곡식 보다 더 빨리 자라는 잡초를 하나씩 뽑아내고, 해충을 방지하기 위해 농약을 친다. 가끔 족제비, 쥐가 논두렁 사이를 파고 들어 구멍을 만들어 물을 세게 한다. 그걸 방지하기 위해 단도리 하며, 물이 잘 들어오나 살피기도 한다. 장마철에는 논이 비에 잠긴다. 태풍이 한 차례 몰고 가면 서있는 벼가 눕게 되는데, 썩지 않게 묶음을 만들어 세워 놓는다. 그 이후 햇빛을 쬐게 해 곡식을 여물게 한다.
해와 비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해와 비를 제외한 모든 것은 농부의 영역이다. 부지런하게 관리해야 하는 인간의 몫이다. 본문에 나와있는 농부는 모순적인 태도를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농부는 곡식을 맺게 하는 핵심적인 일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외의 모든 일을 해야하는 존재는 바로 농부다. 애써 감수하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모든 것을 해야하는 존재, 오늘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농부의 모습이다.
농부처럼 부지런히 일해도 열심과 최선이 우리가 원하는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의 부지런함에 하늘이 감동해 적절한 해와 비만 오는 게 아니다. 어떤 때에는 풍년이 올 때도 있으며, 어떤 때에는 훙년이 올 때도 있다. 농부는 우리가 맡은 삶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되, 최선이 항상 최고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 우리의 삶의 주도권은 우리의 열심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는 것을 강렬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햇빛이나 수분이 공급되지 않아 농사가 망쳤다면 그 다음 농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다음에 자신이 맡은 논에 집중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주도권을 내어맡긴 성도의 삶이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불평이나 원망이 아니라 순리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받아들이되 가장 지혜롭게 ’바르게 대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는 태도다.
최선을 다했음에도 유익한 결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원망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일관된 현상을 보면 최선을 다한 만큼 얻는 결과값이 항상 비례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기준치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는 억울해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하나님을 탓하며 공평하지 않는 분으로 여긴다. 내가 일한만큼의 보수를 반드시 받아야만 하는 당당함을 요구한다.
하지만 농부를 통해 그러한 삶이 옳지 않다고 알려준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를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삶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그 다음을 준비하는 삶.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의 태도다.
오늘 본문은 스토리라기 보다 짤막한 경구들로 우리를 안내한다. 9절, 12절, 15절, 19절, 20절 등 우리들이 살아가야 하는 태도는 ’원망하지 말라‘고 한다. 내가 받을만한 게 있는데 받지 못해 억울해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비롯해 누군가에게 탓을 돌린다. 사실 우리의 삶에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는 것처럼 우리의 결과물을 하나씩 만들어 가신다. 누구 책임인지 따지지 않고, 왜 그랬는지 분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다.
원망하지 말라는 의미와 더불어 인내와 맹세 역시 같은 뜻이다. 내가 가진 거짓을 진실로 바꾸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빌리는 게 맹세 아니겠는가. 나의 집착을 관철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되게 차용하며 현실을 그르치는 것, 이 형태가 바로 거짓 맹세와 같이 나타난다.
기도하라, 선교하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웃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되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좋은 결과로 나타나길 바라는 것, 바르고 온전하게 믿음의 방법으로 대응하고 나아가는 것이 말세를 살아가며 취해야 할 우리들의 모습이다. 즉, 하나님의 주도권을 온전히 인정하는 태도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최선이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도 있고,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해 낙망할 때에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믿음‘에서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결과만 중요한 게 아니다. 과정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1) 100% 끝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죽음 이후 심판이 존재하기 때문에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2) 우리에게 룰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날 때, 죽음 이후 만나게 될 심판에서 우리는 룰에 적용을 받는다. 죽음 이후 우리의 삶 속에서는 혹시 반칙이 있지 않은지, 부정한 부분이 있지 않은지 하나씩 우리의 과정을 평가한다. 얼마만큼의 큰 결과를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는다. 얼마나 성경적이고 타당했는지 그 과정을 보신다. 죽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천국을 기다리며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하신다.
건강한 과정을 살아내길 소망한다. 받아내기 쉽지 않은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고, 이중에 우리의 연약함이 드러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신실한 인도하심을 만끽하자. 비록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니지만 이것 역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일상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 일상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씩 대응하며 살아가자.
한 학기가 끝났다. 야고보서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우리의 삶이 다할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대응하며 말세를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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