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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지기위해모이는교회

24A 5nd, 야고보서 2:14-26, 실전용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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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4 / 야고보서 2:14-26 / <실전용 믿음> / 흩모교 지성해p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갖고 있는 믿음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 일생에 ‘돈이 쓸모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어떠한 대답을 할 것인가.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일수도 있지만 돈의 쓸모에 대해 뼈저리게 경험하기 때문에 곧장 대답할 수 있다. 돈은 액수의 중요도를 떠나 그 안에 우리의 마음을 적절하게 담아 표현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사업, 연애, 결혼, 육아, 노후 등에 돈과 결부되지 않은 곳은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결돼있다.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 쓸모가 분명하다. 다만, 없어서 못 쓰는 것이지, 많아서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몰라서 못 쓰는 경우는 없다.

용도가 분명하다 보니 돈에 대한 우리의 입장도 분명하다. 더 많이 모으고, 아끼고, 불릴지 고민하게 된다. 이에 따라 상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한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모두가 취하는 태도다.

그럼 다른 질문을 던져보자. 오늘 본문에서 믿음이 자주 거론되는데, 그렇다면 ‘믿음은 우리에게 필요한가. 믿음은 우리에게 쓸모가 있는가.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보자. 스스로 내리는 답변에 따라 믿음에 대한 개념이 정리될 것이다.

우리는 으레 ‘믿음‘을 ’구원‘과 연결시킨다. 즉, 믿음은 영원한 생명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고백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고백함으로 우리는 구원(=영생)을 선물로 받았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이라는 것이 절대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 인간의 약속은 결심을 이야기하는 게 대다수다. 예를 들어, 친구와 “00시에 만나자”라는 약속은 본인이 00시까지 거기에 간다는 결단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와 다르다. 단순히 결정, 결단, 각오 정도가 아니라 이미 성취를 이루어졌으며 현실로 진행되지 않은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취소하지 않으신다.

극단적으로 말해보자면, 지금부터 막 살아도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은 취소되지 않는다. 곡해의 소지가 있겠지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설명은 이러하다. 구원받은 백성으로 우리를 인치셨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도 취소할 수 없다. 그래서 구원을 ’은혜‘라고도 표현한다.

믿음은 구원을 결과로 만들었고, 구원은 취소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단단한 관계가 생겼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는 게 믿음을 한 번으로 마무리 하는 것. 만기된 보험 같은 개념으로 여길 수 있다. 효력이 발생했고, 혜택을 충분히 받았으니 그 보험에는 돈을 더이상 넣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믿음과 구원을 이렇게 여긴다. 취소할 수 없는 구원을 얻었으니 믿음을 더 깊이, 더 많이, 더 절실하게 가져야 할 필요를 못 느낀다. 그러다보니 우리에게 ’믿음이 더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입장을 고수하거나, 더 절실하게 필요하지는 않다는 입장이다. 믿음의 깊이나 넓이는 더이상 필요하지 않는다.

믿음은 구원을 소유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믿음의 용도는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구원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더 많이 필요하다. 얻고 소유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유지하고, 누리고, 이 땅에서 만족하며 그 혜택을 누리기까지 더욱 많은 믿음의 깊이와 넓이가 필요하다.

구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가. 구원은 수렁에서 끄집어 낸다는 핵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수렁은 내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다. 수렁에 빠지면 만나야 할 사람을 못 만나고, 일상을 살아갈 수 없으며, 해야할 일을 하지 못한다. 생존은 가능할 수 있겠지만 끝까지 나오지 못한다면 그 안에서 죽어야 한다. 하지만 수렁에서 나온다면 제한됐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상태로 바뀐다. 즉, 구원 받았다는 것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라는 말과 일치한다.

우리의 능력으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죄라는 수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우리를 끄집으셨다. 수렁의 영역에 영향받지 않고 모든 삶을 자유롭게 살 수 있다. 자유롭게 더 많은 죄를 지으며 사는 게 아니라, 죄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에 죄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자유롭게 산다. 믿음은 구원 자체를 허락하기도 하지만, 구원으로 인해 얻게 되는 모든 자유를 가능하도록 돕는다. 믿음은 이러한 용도다.

믿음은 개인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한다. 즉, 구원 받은 개인의 삶이 주어진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깊은 고난에 빨리 벗어나고 싶지만 쉽사리 벗어날 수 없다. 트라우마, 슬픔, 아픔, 상처 등에 벗어나고 싶은 욕구와 갈망이 있지만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은 없다. 주변의 격려와 위로로 벗아날 수 있을까? 아니다. 본인의 깊은 어두움이 밝아지는 것과는 별개다. 그래서 얼마나 좋은 환경에 있는가, 얼마나 좋은 친구가 많은가 보다는 믿음으로만 어두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우리 일상을 살아가는 희노애락과 깊이 연관되어 스며들고 있다. 단순히 하늘에서만 통용되는 개념이 아니다. 우리의 아픔, 고통, 슬픔까지도 계획하시어 운영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인정을 담고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일상에서 벗어나 무엇인가를 위해 도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이러한 용기는 성품에 따른 게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뢰가 있을 때 행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온전하게 신뢰할 때, 믿음을 장착할 때, 기존의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더욱 깊은 관계로 나아가고 싶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이해력이 협소하거나 그릇이 작아서가 아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한 명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라 매 순간 등장한다. 한 사람을 용서하고 깊은 관계를 맺어가는 것은 단순히 성품과 이해력과 그릇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의 문제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 하나님의 시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관계의 끈이 호전된다.

누군가의 결핍을 채워주고 해갈시켜주고 싶은 선한 의지가 있을 터. 상대방의 어려움과 고통에 동참하고 싶은 선한 마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의지를 완벽하게 실현하지는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안에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각박한 세상에 나 스스로도 살아남기 힘든데 나의 적은 잔고와 시간을 타인에게 나누면 이 땅에서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게으르거나 경제적으로 약해서 보다는 그 이면에 깔린 두려움이 원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재정력을 갖추는 것도 의미있겠지만, 믿음을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한다. 내 것이 마이너스가 되어 삶이 엎어지는 게 아니라 부족한 만큼 하나님께서 채워주시고 공급해주신다는 분명한 신뢰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신다는 신뢰가 있을 때 가진 것을 움켜쥐지 않고 타인에게 나눌 수 있다.

개인적인 성품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서부터 성도로써의 삶이 실현된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주신 진짜 만족과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누군가에게 나누고, 가르치고, 채워주는 것은 우리의 성품을 넘어서서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했으므로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을 보조해주는 핵심은 ’맏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믿음은 우리에게 절실하다. 돈만큼, 집만큼, 친구나 인기만큼 절실하다. 기생 라합에게 믿음은 동족에서 벗어나 새로운 민족을 구성할 수 있는 지혜를 제공했으며,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들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길 수 있는 용기로 작동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할 지혜가 필요하며, 세상의 방법에서 떠나 하나님의 방법대로 살아가야 할 용기가 필요하기도 하다. 믿음은 우리를 더욱 단순하게, 지혜롭게, 담대하게 만든다. 즉,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핵심 요소다.

더욱 깊은, 넓은 믿음에 다가서길 바란다.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일수록 믿음을 향한 태도 역시 진지하길 소망한다. 아이디와 패스워드 중 어느 것 하나 어긋나도 새로운 페이지로 넘어갈 수 없다. 원하는 서비스를 누리기 위해서는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꼭 입력해야 한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이 주는 평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복음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 입구를 들어서기 위해서는 아이디와 패스워드가 필요하다. 아이디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라면 그걸로는 천국을 충분히 누릴 수 없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번이 필요하다. 약2장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패스워드를 ’행위‘라고 강조한다.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행하라고 한다. 패스워드가 등록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세계로, 이 세상의 상식으로 운영되는 세계를 넘어설 수 있다.

그러므로 남은 삶 속에 믿음의 깊이와 넓이가 늘어가길 원한다. 머릿속에 가득한 믿음의 정보를 일상과 관계와 사업과 가정에서 하나씩 행동하길 바란다. 그 지식이 행동으로 하나씩 구현될 때, 하나님의 세계에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다. 죽어서 천국에 올라가서가 아닌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 부터 구원의 만족을 누릴 수 있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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